아케인 : 리그 오브 레전드 후기/리뷰 - 10년 썩은 IP가 드디어 폭발했다 (Arcane: League of Legends, 2021)
10년을 넘긴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아케인 : 리그 오브 레전드'가 넷플릭스에서 3화까지 공개되었다. 매 주 3화씩 총 9화 완결로 계획되어 있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1화를 시작했음에도 금세 3화까지 빠져들었다.
우선은 9화까지 전부 보고 나서 소감을 다시 적어야겠지만, 3화까지 확실하게 느껴진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림체.
흔히 유명 미디어믹스로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면 셀화식 화풍에 양키센스가 가미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케인의 그림체는 거부감이 들지 않으면서도 유화를 연상시키는 렌더링이 들어갔다. 아케인의 그림체는 미적으로도 꽤 큰 차별점을 가지게 되는데, 우리가 "애니메이션" 하면 떠올리는 두 가지 스타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스타일은 디즈니 혹은 픽사식 3D 애니메이션이다. 액션이 아닌 일반적인 움직임이 역동성이 살짝 떨어지는 것이 3D 애니메이션의 특징인데, 아케인에서도 이런 모습이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아케인의 실제 제작은 3D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특유의 그림체를 더함으로써 일반적인 3D 애니메이션과 확실한 차별점을 가져갔다.
아마 기획에 있어서도 이러한 점은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미 새로운 캐릭터 홍보영상으로 비슷한 스타일의 단편 영상을 종종 제작한 이력이 있었기에 어느정도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징크스"의 첫 공개 홍보영상. 8년이 되어가는 영상이지만 2021년의 "아케인 : 리그 오브 레전드"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에서 분명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라이엇 게임즈에게 유의미한 경험으로 축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일본에서 주로 제작되는 셀화식 2D 애니메이션과의 차별화다. 미적인 영역에서든, 아니면 취향의 영역이든 이러한 방식을 택하지 않은것은 정말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적으로도 일본의 그것들보다는 픽사의 결과물들이 더 먹히기도 하고, 애초에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로 익히 알려진 캐릭터들을 더 낯설게 만들어 위험 요소를 키울 이유가 없기 때문. 여하튼 아케인은 애니메이션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 "보는 재미"를 만족시킨다 할 수 있겠다.
고유명사가 크게 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고유명사는 탄탄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의 특징이다. 반지의 제왕이 대표적이고, 왕좌의 게임, 스타워즈, 스타트렉 등등 수많은 작품들이 그러한데, 그만큼 설득력있고 방대한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흥미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 자릿수의 캐릭터를 비롯한 각각의 스토리와 여러 대륙으로 이루어진 "룬테라"라는 세계를 가졌지만, 집행자, 아카데미, 학장님, 마법수정, 전쟁, ... 대부분이 새롭지 않으면서 어느 판타지물에서나 등장하는 이름들 뿐이다. 그 외 아케인에서만 등장하는 용어는 몇몇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무대가 되는 몇몇 지명 뿐인데, 그마저도 대충 윗동네, 아랫동네로 불린다.
얼마전 개봉했던 영화 듄에서도 느꼈던 바이지만, 고유명사가 적다는 것은 상당한 이점이다. 만약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등장은 기본이요, 각각의 가문들에 더해 주요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 여럿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해당 작폼을 처음 접하는 관객은 대사의 맥락을 한번에 이해하지 못해 흐름을 놓치고 즉시 재미가 반감 될 가능성이 크다. 아케인은 이점을 정확히 노린듯이 고유명사를 최소화 함으로써 리그오브 레전드를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게 설계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그 오브 레전드를 접하지 않았던 사람도 스토리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기존의 팬들은 게임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던 요소들로 인해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케인으로 인해 드디어 LOL속 캐릭터가 과거가 있고, 성격을 갖췄으며, 다른 캐릭터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실감난다. 기존의 LOL 속 캐릭터 배경의 설명은 10여년의 짧지 않은 세월동안 여러 차례 갈아 엎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깊이없이 급조된 느낌이 강했고, 심지어는 자기들끼리의 설정놀음으로 보여 오글거리기까지 했다. 그 어떤 세계관 설명을 갖다붙여도 '소환사의 협곡'이라는 획일화된 공간에서 권총을 들고 싸우는 일반 사람과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는 공허의 아귀가 투닥거리며 싸우는 모습은 캐릭터 배경의 존재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물론 소환사와 소환사의 협곡이라는 설정을 알고 있음에도).
라이엇(리그 오브 레전드의 제작사)은 하나의 캐릭터를 공개할 때마다 해당 캐릭터의 배경설정과 그에 관련된 세계관 업데이트를 진행해왔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세계관을 갈아엎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LOL 속 캐릭터 배경의 설명은 깊이없이 급조된 느낌이 강했고, 심지어는 자기들끼리의 설정놀음으로 보여 오글거리기까지 했다. 아래 내용은 아케인의 중심인물인 징크스의 배경설명이다. 놀랍게도 바이와 라이벌 관계라는 내용을 빼면 정말 아무내용 없는데, 심지어 바이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도 설정하지 않았던 듯 하다.
징크스
-난폭한 말괄량이-
대부분 사람은 징크스를 위험천만한 무기를 다루는 미치광이로 보았으나 몇몇 이들의 기억 속에는 현실에 비해 지나치게 큰 포부를 품은 '비교적' 순진했던 자운 출신 소녀로 남아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아이가 무분별한 테러를 일삼는 악동으로 변하게 된 계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혼돈을 초래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징크스는 필트오버에 등장한 후 순식간에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징크스가 처음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건 필트오버 시민들을 상대로 몰래 벌인 '장난' 때문이었다. 주로 부유한 상인 연합과 연줄이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징크스의 장난은 적당히 짜증 나는 정도부터 범죄 수준의 위험한 장난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메이 백작 동물쇼에서 풀어준 이국적인 동물들로 진보의 날 거리를 가득 메우기도 했고, 필트오버를 대표하는 다리에 와작와작 지뢰를 깔아 몇 주간 교역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모든 도로 표지판의 위치를 엉뚱한 곳으로 옮겨 놓은 적도 있었다.
오직 혼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마구잡이로 표적을 정했지만, 이 수수께끼의 악동이 벌인 장난은 분주한 도시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연스레 보안관들은 이를 지하도시의 화공 펑크족 소행으로 여기게 되었고 자신의 광기 어린 장난이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둔갑되는 걸 견딜 수 없었던 징크스는 이후 범죄 현장에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곧 화학공학 폭발물과 상어 대가리 모양의 로켓 런처, 연발총을 든 파란 머리의 자운 출신 소녀에 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지만, 당국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묵살했다. 자운 출신의 불량배 따위가 그런 치명적인 무기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징크스의 요란스러운 장난은 계속됐고 범인을 잡으려는 보안관들의 노력은 계속 실패로 돌아갔다. 징크스는 파괴의 현장에 화려한 그라피티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범죄와의 전쟁에 새롭게 참전한 집행자, 바이를 향한 도발의 메시지도 있었다.
징크스는 더욱 명성을 떨쳤고, 그 정체에 대한 자운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갈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오만한 필트오버 놈들에게 저항하는 영웅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두 도시 간의 갈등을 악화시키는 위험천만한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이후 몇 달간 범죄의 강도는 점점 심해져 갔다. 그리고 징크스는 최고의 한탕을 예고했다. 필트오버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천공의 금고 벽에 자신을 상징하는 화려한 핑크색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림에는 집행자 바이의 '아주'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와 금고털이 계획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범행 예고일이 다가오자 필트오버와 자운에서는 묘한 기대감이 흘렀다. 하지만 체포당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징크스가 정말 나타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고한 범행 당일, 바이와 케이틀린을 비롯한 보안관들은 금고 바깥에 함정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징크스는 이미 며칠 전 배달된 거대한 동전 상자에 몸을 숨겨 금고에 침입한 뒤였다. 내부에서 소란이 일자 바이는 또다시 징크스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득달같이 달려갔다. 곧 천공의 금고 내부는 잿더미가 되었지만, 말괄량이 징크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징크스는 오늘날까지 필트오버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활개 치고 있다. 그로 인해 화공 펑크족들에 의한 모방 범죄가 늘었고, 보안관들의 무능함을 꼬집는 풍자극도 수없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필트오버와 자운 시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표현까지 생겨났지만, 아직 본인 앞에서 대놓고 '핑크색이 잘 어울리는 바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징크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바이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징크스의 범죄가 현재 진행형이며 날이 갈수록 대담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애니메이션을 통해 징크스와 바이가 갈라서게 되는 사건도 단순한 오해로 풀어내지 않고 각각의 감정선과 비극적인 상황을 잘 버무려 냈으며, 기존에는 그냥 미친X 같았던 징크스도 나름의 트라우마와 고민을 가진 입체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라이엇이 기존에는 "소환사의 협곡" 하나를 제외하면 그다지 칭찬해줄 구석이 많지 않았는데, 간만에 이름값을 제대로 한 것 같다.
+덧붙임
더빙판과 한글자막의 어휘 차이가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디. 개인적으로 더빙판의 대사가 더 퀄리티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빙에 거부감이 있는사람이 아니라면 더빙버전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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