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체르노빌 후기 : 20세기 최고의 인재(人災)
2020년 도쿄 올림픽과 관련하여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또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올림픽 종목 중 일부 경기장이 후쿠시마현과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는데, 자연스레 방사능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측의 입장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피해는 순조롭게 해결되고 있으며, 방사능 오염지역은 많이 줄었다는 주장이나, "먹어서 응원하자"는 캠페인까지 벌였던 집단이 하는 말이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것이 필자가 학창시절이던 2011년이었고, 9년이 지나고 나서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것을 보면 원자력 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한 시설인지를 알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이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자연재해로 발생한 재해라면, 아직 방사능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덜하던 시절 인재(人災)로 인해 발생한 참사가 있다. 그 유명한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그것이다. 2019년 공개되자마자 각종 찬사와 역대 최고 수준의 IMDb 점수로 화려하게 등장한 5부작 드라마이다. 왕좌의 게임으로 유명한 HBO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더욱 유명세를 탔다. 본 작품의 만듦새도 만듦새지만 참으로 시의적절한 시기에 공개되었는데, 세계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2020년 도쿄 올림픽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너도나도 논쟁거리로 활활 타오르게 만든 "탈원전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 자체는 1986년 4월 26일, 원전의 안전시험 검사를 시작하면서 발생하게 된다. 원래는 1985년에 완공되기 전에 검증이 끝났어야 할 시험이었지만, 냉전시대의 소련에서 원자력 발전소 조기완공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제대로 된 검증을 거치지 않고 서둘러 완공시킨 것. 비상상황에서 발전기의 작동 중지와 그에 대한 안전장비 시스템을 검증할 필요가 있었고 이론적인 해결책이 준비된 상황이었으나, 충분히 숙달되지 않은 직원들 + 시험이 도중에 12시간 연기되었다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발전기 출력을 크게 낮추면서 상황은 마치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가 되어버린다.
원래라면 충분히 성공했을 "이론적으로 입증된" 시험이었다. 후쿠시마와 달리 체르노빌이 달랐던 점은 '인간에 의한' 재앙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극중 최악의 모습을 보이는 인간은 아나톨리 댜틀로프, 발전소의 부소장이다. 발전소의 노심이 폭발해서 노심의 흑연조각이 곳곳에 흩뿌려진 상황에서도 원자로 내부는 멀쩡하다고 판단해 군과 소방인력을 최대로 투입함으로써 방사능에 의한 인명피해를 최대로 키워버린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안타깝지만 납득은 되는 일이다. 당시로썬 노심이 폭발한 원인을 원자력 전문가들도 쉽게 추측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통제실 외부의 인원들은 당일 시험에 관한 공지를 몰랐으며, 통제실 내부의 인원들은 입사한지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입에, 안전규정까지 깡그리 무시해가며 댜틀로프는 시험을 강행한다.
체르노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KGB의 위협(KGB는 소련의 정보기관으로, 소련의 원자로 결함을 숨기기를 강요했다.)을 무릅쓰고 직접 발로뛰고, 그 후에는 원전의 결함보수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낸 발레리 레가소프도 인상깊었지만 보리스 셰르비나는 이 드라마 내내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1화에서는 공산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원전사고 최초 보고서를 보고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치부하며 레가소프와 반목한다. 결국 고르바초프에게서 레가소프와 함께 사고 현장에 가서 직접 살펴보라는 지시를 받고 현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만 해도 원전에 대한 지식은 전무해서 레가소프에게 정말 기초적인 설명만 들은 상태였다. 그랬던 인물이 사태의 심각성과 레가소프의 행동을 보고 소련의 장관으로써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마지막 화의 재판에서는 한 명의 증인으로써 원전에 대해 전문지식을 줄줄히 읊는 장면은 체르노빌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보리스 셰르비나:
"나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야, 발레리. 늘 그래 왔어. 언젠가 중요한 사람이 되길 바랐지만 그렇지 못했어. 난 그저 항상 더 중요한 사람들 곁에 있었을 뿐이지..."
발레리 레가소프:
"여기에 저 같은 과학자는 많습니다. 그들 누구든 저를 대신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장관님은... 우리가 요청한 것,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조달해 주었습니다. 인력, 자재, 월면 로봇까지도요. 누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이 제 말은 흘려들었지만 당신의 말엔 귀기울였습니다. 수많은 관료들과 그 부하들 중, 복종밖에 모르는 그 많은 바보들 중에 그들이 실수로 좋은 사람 한 명을 보낸 겁니다. 맙소사, 보리스, 이 일에서 당신만큼 중요했던 사람은 없어요.
실화를 기반으로 감정을 절제한 채 최소한의 각색만을 거친 다큐멘터리 드라마이지만, 각본과 연출이 특히 빛났다고 할 수 있다. 노심이 폭발한 구역에는 원자로를 구성하고 있던 흑연조각이 도처에 널려있게되는데, 여기서 엄청난 방사능을 뿜어내기 때문에 달 탐사용 로봇조차 고장이 발생한다. 인명피해를 막기위해 동분서주하던 레가소프조차 결국 '바이오 로봇(=인간)'을 투입하기로 한다. 방호복을 갖춘다고 갖췄음에도 너무나도 강력한 방사선때문에 작업시간은 1분 이내로 제한되며, 그 시간안에 삽으로 흑연을 퍼서 날려야 한다. 해당 씬에서 아주 위험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방사선 측정기 측정음과 같은 배경음이 점점 강해지다가 옅어지는 연출을 통해 관객의 심리를 압박하는 연출이 압권이다.
21세기의 문명은 전기 위에 세워진 문명이며, 대한민국의 정부에서는 한때 탈원전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원자력 발전의 효율에 기댈 수 밖에 없는것이 현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매우 위험하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누리는 거의 모든것은 원자력에 의해 현실화되는 셈이다. 때문에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현대 문명에서 가장 최악의 사고였던 체르노빌이 단지 "옛날"의 사고가 아니라는걸. 당시 사건의 당사자들 중 일부는 최근까지 살아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작중에 등장하는 고르바초프만 해도 당당히 살아있다. 당시의 뒷수습 역시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라 '먼 미래엔 해결책이 나타날테니, 일단 그때까지 덮어두자'는 식이었고, 방사능을 뿜어대는 요인들을 콘크리트로 떡칠해놓았지만 그 내구도는 다해 몇년 전 우크라이나에서는 새로운 석관을 설치해야 했다. 더욱이 정상적으로 가동중인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폐기물들은 그 처리법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과거에 일어났던 참사가 아닌, 아직까지도 그 피해가 현재 진행중인 재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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